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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디자이너라면 그녀처럼

살아 있는 전설, 김민주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녀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본인조차 언제나 한결같은 가냘픔과 섬세함을 지니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날이 서 있는 눈빛도 살아 있다. 그리고 한없이 따뜻한 인간미도 마음 한켠에 간직하고 있다. 더 이상의 수식어도 필요 없는 김민주 디자이너. 이제 그녀를 만나볼 시간이다.  Photographer 최승정 Editor 권희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더위가 제법 익숙해지는 여름의 문턱이다. 아니 이제 문턱을 지나 곧 기승을 부릴 여름의 한복판으로 향해 가는 그런 날이다. 청담동에 마치 그리스의 궁전처럼 자리 잡은 그녀의 공간은 이 무더위를 날려줄 것 같아 걸음을 재촉했다. 훅 하고 바깥의 더운 날씨를 숍 전체에 한 움큼 전달해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살금살금 신발을 벗는데, 가냘픈 체구의 뒷모습이 보인다. 눈송이처럼 하얗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눈부시게 환한 웨딩드레스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리며 한창 작업에 열중인 그녀. 해외를 집 드나들 듯 오가며 바쁜 일정에 그야말로 몸이 열 개 스무 개는 되어야 하루 일과가 무사할 것 같은 디자이너이다. 섬세하고 가녀린 체구의 장본인은 바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의 대모이자 언제나 정열적인 에너지를 뿜어대는 김민주 디자이너였다.

카랑카랑한 보이스, 에지 있는 의식

김민주 디자이너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파워풀한 활동력으로 유명하다. 그녀를 안다는 사람들은 대개 얘기할 때 ‘가장 존경하지만, 또 가장 무섭기도 한 분’이라는 표현을 빼놓지 않는다. 그만큼 김민주라는 이름 석 자는 웨딩드레스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하나의 고유 명사로 인식된다. 그녀의 웨딩드레스는 우리나라 최초로 오트 쿠튀르의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근 30년째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면서 그녀가 초지일관 지켜왔던 것은 신부가 느껴야 할 ‘즐거움, 아름다움, 독특한 고급스러움’이다. 이미 그녀는 1980년에 아이보리 톤의 유니크한 웨딩드레스를 선보여 전 세계를 매료시켰으며, 연이어 골드와 실버 색상을 웨딩드레스에 접목시켜 전혀 색다른 드레스를 등장시켰다. 당시로써는 매우 센세이셔널한 일이었다고.

“아마 1980년대 중반이었을 거예요. 롯데호텔에서 기라로쉬와 협력해 패션쇼를 열었고 이브생로랑과도 함께 했죠. 88올림픽 때에도 쇼를 열었고 뉴욕 컬렉션과 파리에서 열린 프레타 포르테에도 참여했어요. 그 후로도 숱하게 많은 패션쇼에 서고 미스코리아 대회 드레스 협찬과 심사위원도 하면서 웨딩드레스가 단순히 신부만을 위한 의상이 아니라 패션의 한 분야로 인식되게끔 노력했답니다.”

힘이 있지만 조금은 날카로운 목소리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눈빛으로 시종일관 얘기를 풀어나가는 그녀는 흡사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여름 햇살과 닮았다. 굳이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지팡이로 툭 건드리면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마법의 상자처럼, 김민주의 토크 박스는 그칠 줄 모른다. 아마도 웨딩드레스와 울고 웃었던 지난날의 복잡다단했던 세월 때문이리라. 그녀는 순백색의 하얀 컬러의 웨딩드레스를 넘어 더 고급스럽고 우아한 아이보리 컬러의 드레스를 디자인하고 골드와 실버를 적절히 매치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디자인은 탤런트 전인화가 자신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웨딩드레스로 더 유명해졌다.

“어느 날 스키장에 가족과 놀러 간 적이 있어요. 주차를 하려고 차를 대고 있는데 시멘트로 아무렇게 칠해져 있는 뒷벽을 발견했죠. 마구 거칠게 칠해서 외롭고 고독해 보이면서 뭔가 이야기가 담긴 느낌을 받았는데, 글쎄 그 벽 아래에 한 떨기 장미꽃이 혼자 피어 있는 게 아니겠어요. 한겨울에 장미꽃이 그렇게 예쁘게 피어 있는 건 처음 봤죠. 그건, 자연적인 충격이었어요. 시멘트벽의 거친 느낌과 장미꽃의 우아함이 저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건 곧바로 전인화 씨의 드레스 디자인으로 연결됐죠.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어요.”

김민주에게 영감을 받는 원천이라든지 뮤즈는 따로 없다. 이 세상 모든 사물과 순간순간, 그리고 예술 작품들 모두가 그녀의 뮤즈이자 영감의 근원지다. 항상 고뇌하는 예술가라면 언제 어디서든 영감을 받을 준비와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다. 그런 감각은 독창적이고 우아한 웨딩드레스를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는 디자이너 김민주에게 끊임없이 샘솟는 본능 같은 것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이런 열정과 근성이 부러웠다. 그리고 의심스러웠다. 정말 그녀는 그런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세상만사에서만 얻는 것일까?

“우리 집에는 외국 서적이 한 권도 없어요. 누가 그러더군요. ‘왜 선생님 집에는 외국 잡지 한 권이 없느냐’고요. 패션도 트렌드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인데 남의 디자인도 참고하고 패션의 흐름도 알려면 잡지나 서적도 틈틈이 읽어야 한다고요. 맞는 말이죠. 저도 잡지나 책을 많이 보는 편이지만 소장은 하지 않아요. 자꾸 곁에 두게 되면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모방을 한다거나 하나라도 카피를 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책을 많이 본다고 누구나 그런다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녀는 웨딩드레스도 패션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트렌드라는 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글쎄, 웨딩드레스에 따로 트렌드가 있을까? 신부의 몸에 맞게, 신부가 결혼할 홀의 분위기와 맞게, 그리고 하객들의 분위기와 어울리게 연출되고 디자인되어야 하는 게 웨딩드레스가 아닐까. 어느 인기 드라마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인 ‘한 땀 한 땀’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김민주의 웨딩드레스는 명품이라 불릴만한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그렇다. 웨딩드레스도 명품으로 제작되어야 하기에 굳이 트렌드를 부여하면서 남들과 똑같은 디자인으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박하더라도 자신의 개성과 하객에 대한 예의를 갖출만한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게 당연지사다. 그렇게 정성스레 고르고, 생각하고, 입고… 아마도 그런 결혼식을 한 부부라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하지 않을까 싶다고. 김민주 디자이너는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때로는 신랑 신부에게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인생 선배로서, 조언자로서 여러 가지 충고도 아낌없이 베푼다.

“부부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서로에게 일부종사한다는 생각으로 결혼에 임했으면 해요. 이런 얘기 하면 고리타분한 얘기나 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웨딩드레스만 휘황찬란한 작품을 입으면 뭐 합니까? 인생을 작품처럼 근사하게 살아야죠. 안 그래요?”

그녀의 이런 깨어 있는 생각을 좋아하는 고객들은 언제나 그녀의 옷을 찾는다. ‘김민주 웨딩 컬렉션’은 너무 문턱이 높다는 말들도 많다. 실제로 그녀의 웨딩드레스는 명품의 가치에 비준해 가격 또한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 년에 두 번씩은 해외로 직접 나가 원단과 소재를 꼼꼼히 구입하고 수많은 쇼를 열어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선보이는 노력을 30여 년 동안 변함없이 기울여 온 그녀의 면면을 보면 그 값이 아깝지 않게 생각될 것이다.

화려한 감동을 지어내는 예술가

일 년을 하루처럼 바삐 지내는 그녀이기에 그동안 울리고 웃겼던 에피소드도 많다. 특히 스위스로 입양된 한국의 고아였던 신랑이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 사연은 가슴이 먹먹해 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선생님의 웨딩드레스를 제 신부에게 입히고 싶습니다’로 시작된 편지는 ‘그럴 돈이 없으니 매달 꼬박꼬박 돈을 갚겠습니다.’는 다짐으로 끝났는데, 실제로 그는 웨딩드레스 비용을 잊지 않고 매달 보내왔다. 종래에는 그녀가 됐다고 하는데도 끝끝내 완불하고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정말 울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녀의 눈빛이 또 한 번 촉촉해진다. 바로 자신의 아들에 대한 속내를 밝히는 순간이다. 웨딩드레스 만든다고 일에 미쳐 있던 지난 30년, 아들은 항상 엄마를 그리워했다. 한 번은 엄마 신발의 앞코를 현관문 쪽이 아니라 집 안쪽으로 언제나 향하게 고쳐 놓는 일이 있었는데, 엄마가 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의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던 것.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언제나 마음 한구석을 채우고 있단다. 일만 사랑하고 일만 우선일 것 같은 그녀에게 언제나 최고는 바로 가족이 아닐까. 그녀의 숍에는 자신과 쏙 빼닮은 아들 사진이 언제나 함께 한다. 이제는 일을 그만할까도 생각해봤다. 아들이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며느리에게 이 사업을 물려줄까도 얘기해봤지만 아들이 아서란다. 워커홀릭은 엄마 한 명이면 된다고. 철옹성 같은 김민주 디자이너의 일상이 여느 평범한 엄마의 따뜻함과 인간적인 매력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랍기도 했다. 철두철미한 성격,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에서 언제나 완벽한 쇼를 선보이는 능력, 한 번 만나면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인간적인 매력까지 겸비한 그녀에게 가족은 이렇게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존재이며, 감동을 제작할 수 있게 하는 모티브를 제공해주는 소중한 선물인 것이다.

작년 9월에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렸던 웨딩페어 쇼, 지난 5월에 열렸던 메이필드 호텔 웨딩페어 쇼 등 모두 호텔에서 ‘김민주 웨딩’ 아니면 안 된다는 조건에서 진행된 결과물들이다. 해외 출장이 잦은 그녀에게 연락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이지만 일단 연락이 되고 쇼 계획이 잡히면 그녀는 1백 퍼센트 완벽한 쇼를 보여준다. 준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도 그녀 앞에선관계없다. 물론 힘은 들지만,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쇼이기에 하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는 게 철칙이다. 서비스도, 디자인도 그레이드가 올라갈수록 힘들어지고 그만큼 배의 노력이 요구된다. 돈을 좇았다면 지금의 명성이나 작품이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내 딸, 내 며느리를 입힌다는 생각 하나로 소재 하나하나, 작업 한 땀 한 땀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제 그녀는 또 다른 시도를 하려 한다. 바로 김민주 웨딩의 세컨드 브랜드 도입 계획이 그것이다. 격을 갖추면서도 합리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킬 생각인데, 이 계획으로 그녀의 머릿속은 또 한 번 복잡하지만 즐거운 구상 중이다. 30여 년의 세월을 한 가지의 모습으로 정열적으로 달려온 그녀를 인터뷰하고 나오는 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무더위에 땀을 흘릴 수 있고 근성과 정열을 생각할 수 있는 지금의 젊음과 반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녀처럼 일 년을 하루처럼 살아가 보자. 그게 바로 ‘김민주식 라이프스타일’이 아닐까.

심플하지만 김민주 웨딩만의 에지 있는 라인이 돋보이는 웨딩드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