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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대(Dresser)에서 시작되는 여성의 시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제작된 식탁 위의 은제품들과 달리, 은밀한 공간, 개인적인 공간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은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어 섬세하고 아름답다. 시대를 초월해 여성에게 있어 화장대 앞의 시간은 가장 은밀하며 여성으로 완성되는 아름다운 시간. 그 시간을 함께 채워주는 드레서 위의 앤티크 소품들. 글 | 야스미 사사키

어릴 때부터 어머니 몰래 화장대가 있는 방(Dresser Room)에 들어가서 화장대 서랍을 열어보는 것이 나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서랍에서는 은은한 향이 나고, 반짝반짝 빛나는 화장품 용기나 보송보송한 브러쉬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어머니는 향수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늘 마음에 드는 향수병(Atomizer)에 옮겨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초등학생이 된 이후부터 어머니는 다 써서 필요 없어진 예쁜 빈 병들을 주시곤 하셨는데, 빈 병을 받아든 나는 마치 숙녀가 된 듯 마음이 설레고 기뻐 항상 어머니의 화장대를 기웃거리며 다음 향수병을 기대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늘 향수와 예쁜 화장을 하며 아름답게 계시길 바랬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대학생이 된 기념이라며 어머니는 아끼시던 앤티크 향수병과 화장케이스 세트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블루 색의 에나멜 세공과 크리스털 위에 예쁜 모양이 조각되어 있는, 그야말로 어머니의 취향이 잘 묻어나는 디자인의 제품이었습니다. 향수병의 마개는 은 재질과 향기를 제대로 보관하기 위한 코르크 재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코르크 마개를 열면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자상한 향이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앤티크는 일상생활 속에서 실제로 사용해야만 즐거움이 더한다.’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내가 유일하게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는 이유입니다.

어머니의 향수병이 계기가 되어 화장대 위의 앤티크 소품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물건을 만나는 사이 많은 화장품 용기들이 보석처럼 아름답고 세공도 섬세하며 소재도 값진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여성에게 있어 화장대 앞의 시간은 ‘아름다운 여인’임을 실감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인 만큼 그 시간에 함께하는 드레서 화장대 위의 화장 세트 역시 소중하게 만들어진 듯합니다.

런던 유학 생활 동안 나는 수업이 끝나면 바로 앤티크 보석점을 경영하는 친구가게로 가 가게 일을 도우며 딜러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주말에는 교외 앤티크 마켓에 가고, 연휴가 길어지면 파리까지 날아가서 골동품 가게를 돌아다니는 등 앤티크에 빠져 지내던 20대 그때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많은 명품과 만나고 가장 많은 앤티크 제품을 찾아다녔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파리에서 친구와 함께 우연히 지나던 잡화점에서 아름다운 19세기 화장 케이스 세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빈티지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접시와 가구들로 꽉 차 있는 작은 가게 안에서 앤티크 특유의 품위 있는 빛을 뿜어내고 있던 그 세트를 발견하고, 나는 한순간 마음을 뺏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거 주세요.’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놀란 주인은 흥분된 목소리로 ‘메르시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더니 주변에 있던 글라스와 다른 제품을 덤으로 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게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 순식간에 팔려 너무 기뻤던 것입니다. 같이 있던 친구는 진짜 앤티크인지 걱정을 했지만, 나는 그 섬세한 모양이 당시의 상류층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이고, 영국 은제품에는 없는 프랑스 은세공 장인 특유의 세련된 손작업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그 주인이 옷깃에 달고 있던 브로치(여성용)가 나폴레옹도 좋아했던 죠지앙 스타일의 스톤카메오였던 것도 나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주인은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 틀림없다.’는 직감이 들어 안심하고 그 화장 케이스 세트를 구입했습니다.

거북의 등껍질인 대모갑으로 만들어진 화장용 세트는 앤티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스무 살쯤, 아직 지식도 별로 없고 보는 눈도 갖지 못한 초보자 시절에 런던 앤티크 마켓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당시 그 마켓은 앤티크 판매업자들이 진지하게 거래를 하는 세계여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적인 곳이었는데, 미숙한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딜러를 만나 마켓을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딜러인 그녀가 수집한 은제품은 마치 미술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운 예술품이었고, 제품 하나하나에서 그녀의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대모갑 화장용 세트는 소재의 희소성과 거기에 새겨진 절제된 은세공 장식이 그동안 내가 찾던 앤티크 제품이었습니다. 값도 묻지 않고 사겠다고 하는 나를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다, 영국 앤티크 실버의 판별 방법을 친절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품에 새겨진 작은 각인으로 대영제국의 정식 은 제품이라는 증거를 알 수 있으며, 제작 연대와 장소의 기록으로도 제품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는 판별 기준이 된다는 사실이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각인 판별에 관한 입문서와 작은 확대경을 구입하고 마치 앤티크 딜러가 된 양 행복했습니다. 그 후 딜러인 그녀와 더욱 가깝게 지냈고,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앤티크 실버에 대한 나의 스승이 돼주고 있습니다. 그때의 입문서는 오래 사용해 너덜너덜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제구실을 하고 있는 제 소중한 친구입니다.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영국의 상류 귀족이나 부유한 미들 클래스들은 손님을 다과회나 디너에 초대하고, 아름다운 은제품과 크리스털로 꾸며진 테이블을 준비하는 것으로 재력을 과시했습니다. 또한, 남자들은 자신의 부인을 드레스나 장식품으로 치장시켜 사교계에서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막대한 재력으로 지지해온 그 예술품들은 탁월한 기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정치 역사적 배경과 의도가 서로 복잡하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재력이나 권력의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생각하는 순수한 애정에서 태어난 예술품에도 마음이 갑니다. 예를 들어 화장대 주변의 소품이나 침실 등 개인적인 공간에서 사용하는 것들은 애정을 담은 선물로 제작되는 일이 많았고, 애인이나 남편으로부터 본인의 이니셜이 들어간 화장케이스 세트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서로 친밀하다는 증거가 되어 무엇보다 기쁜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식탁의 은제품들은 그 시대의 유행이 강하게 나타나 있을 때가 많은 반면에, 개인적인 공간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은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는 디자인이 많습니다. 화장대 주변의 소품들, 그 외 란제리나 침구에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은 모두가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기 위한 멋이고 여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을 꾸며 입는 것이야말로 여성의 마음을 충족시키고, 드레스나 보석을 착용하는 것 이상의 아름다움을 여성들에게 부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 화장 케이스 2 순 은의 마개와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향수병, 안쪽에 코르크 마개가 하나 더 있어 향을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모두 1929년 영국 버밍엄제.

3 화장케이스 세트 1890년 프랑스제. 확실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화장 솜과 같이 화장시 필요한 것을 수납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길드 세공이 아름다운 뚜껑 중앙에는 모노그램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고, 케이스는 커팅이 아름다운 크리스털로 만들어져 있어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

4 거북의 등껍질인 대모갑과 순은 재질로 만들어진 화장용 세트 왼쪽부터 빗, 액세서리 케이스, 손거울. 1921년 영국 버밍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