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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미 코멘트 : 0 분류 : 지식/노하우 > 엔터테인먼트/예술 > 문학

•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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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몰랐다. 아무도 내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

   

   미대에 진학하였으나 역시 이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 우리 과 정원은 40명 이었는데,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심지어 제주도까지, 전국에서 몰려온 이들로 가득했다.

   

  학번 동기 중에는 우시장에서 소를 팔다 그림으로 전향한 형님도 계셨고, 지방지 기자로 활동하다 부인과 함께 나란히 입학한 형님도 계셨다. 그 형님의 부인은 교사이셨는데, 형수님께 가르침을 받은 초등학생 한 명이 훌쩍 커서 같은 과 선배로 먼저 입학해 있었다.

   

  학과 선배가, 늦깎이 신입생이자 초교 은사인 형수님께 와서 꾸벅 인사를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루어 놓은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 그들. 그들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있었고, 길이 안 보인다 생각되면 사막에라도 길을 내서 걸어갈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길은, 찾는 것일까 찾아지는 것일까.

   

  청춘은 어렵다. 이미 한참을 청춘에서 멀어지고 난 다음에야 뒤늦게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벌써 길을 찾은 청춘이라면 격려와 환호의 박수를. 아직 찾고 있는 중이라면 여유와 믿음의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흔들리는 청춘에게, 세 권의 만화를 건넨다. 만화이되 문학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성장통을 겪은 이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푸른 젊음에게 위로가, 또는 응원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꽃이 지기 전 

  나는 봄으로 돌아갔다.

  마흔여덟. 평범한 샐러리맨. 가족이 기다리는 중년의 남자. 그런 그가 열네 살 어릴 적으로 되돌아갔다. 외국 바이어들을 접대하던 일상의 영어실력으로 압도적인 영어 성적을 거두고, 체육시간에는 돋보이는 운동 신경으로 달리기에서 1등을 기록한다. 마흔여덟에서 열네 살로 돌아갔으니 몸은 또 얼마나 가벼울 것인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선생님도 다시 돌아간 열네살의 사내에게는 관심을 보이고, 혼자 좋아하고 말았던 소녀 역시 남자에게 관심을 보인다. 모든 상황이 좋다.

   

  그러나 남자는 알고 있다. 반듯하고 성실한 자신의 아버지가, 자녀와 아내를 버리고 자신이 중 2때 집을 나가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젊어서는 알 수 없고, 늙어서는 할 수가 없다. 젊음에게는 아무도, 그 누구도 길을 가르쳐 주지 않고, 늙어서는 모든 것을 안다 하여도 해낼 힘이 남아있지 않음이다.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은 남자는, 열네 살로 돌아가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 아버지, 아버지는 이때 이런 마음이셨겠군요. 바로 오늘,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지만, 나는 그 나이의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에 아버지를 붙잡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남자는 아버지와 시간을 흘려보낸다. 시간을 놓아주고, 상처를 놓아준다. 잊을 순 없지만, 상처로 남지는 않는다. 시원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였으나, 어느덧 마흔여덟 사내의 가슴에 남아있던 열네 살의 아이는 위로를 받는다. 마음의 아이가 위로를 받자, 마흔여덟의 남자는 비로소 육신의 나이만큼 마음 또한 지혜로운 나이가 된다.

   

  다시 열네 살로 돌아가 공부를 조금 더 잘하고, 관심 있던 여학생에게 마음을 받고, 선생님께 인정을 받는 것도 좋으나, 남자는 마흔여덟이 되도록 마음 속에 쓴 뿌리로 남아 있던 열네 살의 기억과 아버지를 마음에서 비로소 놓아주게 된 것이다. 푸드득. 새가 한 마리 날아가듯 몰이해도, 상처도 푸드득.

   

   

  혹시 어른이 되려는 거니?

  

  대학 시절,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당시 난 학교보다 복싱 체육관에 더 성실히 출석했다. 생활과 차림은 끔찍할 정도로 궁상스러웠지만 내멋에 취해 살았다. 거칠었지만 펄떡거리는 활어 같은 삶이었다. 복싱 신인왕전 출전, 2전 1승 1패. 지고나서는 바로 짐을 싸서 합숙하던 모텔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사실 난 알고 있었다. 

   

  운동에 전혀 타고난 소질이 없음을. 네 번을 더 이기면 우승이었지만, 네 번의 승리는 꿈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패하고 난 바로 그 다음 주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첫 직장에 신입사원으로 출근을 했다.

   

  몸은 불어갔고 그와 비례하여 사회생활에 적응을 해 나갔다. 아니, 내가 적응한 게 아니라 사회가 나를 길들여 갔다. 나는 양식장의 횟감이 된 것이다.

   

  우연히 후배를 만났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후배. 놀라 묻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배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줄 알았어요. 선배는 천상 예술가였는데'라는, 눈치 없는 녀석. 허허허 웃고 만다. 

  취업 전에 비해 몸이 12kg가 불었다. 그 12kg만큼, 나는 꿈과 멀어진 것일까? <바이바이 베스파>의 가슴을 후비는 대사가 떠오른다.

  
  '혹시 어른이 되려는 거니?'

   

  다섯 대의 클래식 스쿠터를 중심으로 엮어가는 다섯 편의 씁쓸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성장통 따윈 나와 관계 없다 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 책을 읽지 마시길. 청춘을 관통하는 고민과 무게를 감당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재미나 공감 따윈 느끼지 못할 것이므로.

   

  이 책의 눈부심에 비해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바이바이 베스파>가 소년과 어른에게, 눈부신 청춘을 보낸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눈부신 작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지구영웅전설> 등으로 익히 알려진 무규칙 이종소설가 박민규의 추천처럼, 아마도 다시는 이런 이야기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무모하고 무례해서 아름다운

  청춘을 위한 찬가 _<천하장사 마돈나> 이해준 감독

  <판타스틱 소녀백서>라는 영화 제목을 말하는 편이 더 친근하지 않을까. 영화의 원작. <고스트 월드>. 먼저 주의 사항 짚고 넘어가자. 이 책, 서점에 서서 휘리릭 넘겨 보면 분명 '재미 없어' 보일 것이다. 고향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그래, 미국 만화다. 미국 만화의 캐릭터는 대부분 영화화되어 무척 친숙하지만, 미국 만화책의 연출 방식은 여간해선 쉽사리 친해지기 어려울 듯싶다. 그러니 주의하자.

   

  검은색과 푸른색 단 두 가지 색으로 인쇄된 이 책은, 초등 저학년 네모칸 쓰기 공책처럼, 화면이 농지정리된 농토처럼 반듯반듯, 말풍선 안의 글씨는 왜 이리 정직하고 딱딱하게 꽉 들어차 있는지. 잘생기거나 예쁘거나 싸움 잘하거나 부잣집 자식이거나 또는 엄마 친구 아들이거나 등등등. 흔히 떠올리는 청춘 만화에 나올 법한 캐릭터는 단 한 명도, 제발 나와달라 빌어도 단 한 명도 안 나온다.

   

  하지만 주의 사항을 잘 숙지하면 세상은 편해지기 마련이다. 이 작품, 재미 없어 보이지만 재미있다. 아아, 물론. 만화책을 좀 읽었다 하는 분들이 보셔야 하겠다. 나름 인내가 필요한 책이니까. 이 책을 낸 출판사인 '세미 콜론'의 책들이 대부분 그렇다.

   

  입문자보다는, 유단자를 우대한다고나 할까. 반전도 없고, 절정이라 할 만한 사건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상스러운 욕설에, 찌질한 삶에, 돈 없고, 빽 없고, 대학은 문턱에서 미끄러지고, 내가 먼저 좋아한 놈인데 그놈은 내 친구 년이랑 뒹굴고 있고. 아아, 구질구질하여라.

   

  하지만 그래서 청춘이다. 내 삶에, 내 친구의 삶에, 심지어 엄마 친구 아들의 삶이라 할지라도, 고교생의 삶 그 어디에 반전이, 절정이, 돈이, 빽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적당히 리얼해 주시면 안 될까요. 보는 내내 불편해요,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은 청춘의 빈곤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소녀의 첫경험 마저도 환상은 다 걷어내고 행위만이 묘사된다 하겠다. 그러면서 친구에게는 달콤한 경험인 척 부풀려 말하고.

   

  그래, 이 작품. 커피에서 휘핑크림이고 뭐고 다 걷어냈다. 걷어내니 쓴 커피만 남더라. 하지만 커피의 참맛은 한약 뺨치게 독한 에스프레소가 아니던가. 크림처럼 보기 좋고 달콤한 첨가물 따윈 싹 걷어낸 쓰디쓴 커피같은 <고스트 월드>. 쓴 커피, 그러기에 진짜 커피. 커피의 참맛. 인생의 참맛. 바로 그런 게 청춘 아닐런가. 솔직하고 당당한 두 소녀에게 하이파이브 제대로 날려준다. 아잣, 아잣, 아자잣!

   

  출처: 찬이 아빠의 소소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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